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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페이지 내용 : 18 + Journal of the Electrical World Monthly Magazine 전기역사를 찾아서 _ 58회 석등은 사찰이나 궁궐, 능묘와 같은 곳에 세우는 석조물 등기 器 로서, 대개는 놓인 곳에 따라 석등롱 , 광명등 光 , 장명등 등과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석등롱은 말 그대로 돌로 만든 등롱이라는 뜻이며, 분묘 앞에 세운다. 이것을 장명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유교적 예제 에 따라 세워지는 것이다. 조선시대 분묘제도에서는 피장자의 신분 혹은 품계에 따라 분묘의 꾸밈을 엄격하게 제한하였는데, 일품계의 재상에 한해 장명등을 세울 수 있도록 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예제가 만들어진 조선 초기에는 이미 무덤에 장명등이 세워지고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는 신분과시를 위한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여기에 불을 밝히고 야간에 필요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조명기구이다. 이러한 장명등은 다른 의미로 사찰이나 관가 등 공공건축물의 처마 끝에 달거나 마당에 기둥을 세워 불을 밝힐 수 있도록 장치한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사용되었고, 그 범위가 확대되어 민간에서 대문 밖이나 처마 끝에 달아 두고 밤이면 켜는 유리등을 뜻하기도 하였다. 불교 사찰에서 석등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가람의 배치에 따라 불전 앞이나 탑, 혹은 부도 앞에 설치된 종교의식용 등기구이며,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 불등 또는 헌등 으로 불리기도 한다. 불교 전래 이전의 유적과 기록에서 석등이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석등은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분묘의 장명등으로 변화해 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는데, 현존하는 유물 자료를 보면 시대별 변화의 추이를 역추적할 수 있다. 석등의 형태는 직접 불을 넣어두는 불집, 즉 화사석 을 중심으로 그 아래 부분인 기대석 基 과 그 윗부분인 옥개석 의 세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기대석은 다시 화사석 바로 아래 상대석, 중대석 혹은 간주 竿 , 그리고 사진1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 통일신라시대// 석등 높이 315cm, 사자상 높이 103cm// 국보 제5호//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조선총독부, 《조선고적도보》4 1916년, 조선총독부장판 사진2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光 // 통일신라시대// 석등 높이 274cm, 사자상 높이 86cm// 국보 제103호// 광주 북구 매곡동 산83-3 국립 광주박물관// 정영호 감수, 《석등 부도 비》한국의 미 15 1990년, 중앙일보사 사진3 합천 영암사터 쌍사자 석등[ // 통일신라시대// 석등 높이 261cm, 사자상 높이 92cm// 보물 353호//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1659//《신라의 사자》 2006년, 국립경주박물관 사진4 여주 고달사터 쌍사자 석등[ 高 // 고려시대// 석등 높이 243cm// 보물 282호//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5 국립중앙박물관// 정영호 감수,《석등 부도 비》한국의 미 15 1990년, 중앙일보사 석등 사자 석등 ① 사진 1 사진 2 사진 3 사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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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페이지 내용 : 하대석으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간주석이 석등을 떠받치는 실질적 기둥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형태에 따라 분류를 하면 크게 8각 기둥형, 쌍사자형, 고복형 간주로 나눌 수 있다. 시대를 내려오면서 화사석의 각과 화창 형태가 투박해지고, 간주 역시 짧고 굵어지는 형태로 변화함으로써 분묘에 세워진 장명등과 비슷해지는 과도적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하는 것은 간주석의 형태가 사자로 이루어진 석등이다. 통일신라기 유물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사자 양식은 이전 글에서 소개된 고려시대 청동촛대 광명대 가운데서도 쌍사자 또는 사사자의 형태를 갖춘 몇몇 등기구를 볼 수 있었다. 사자가 우리나라에 서식하지 않는 동물이면서도 그 형태나 양식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문화전파의 시각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동물로서 사자는 백수 의 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프리카ㆍ 유럽ㆍ서아시아ㆍ인도 등 유라시아 전 지역에 걸쳐 분포하는 고양이과 동물이다. 현재는 아프리카와 인도 일부 지역에서만 서식 하고 있는데, 이미 기원전 3세기경 인도에서부터 사자 범어로 ‘simha’ 라고 하며, 불교에서는 사자 를 사자 로 쓴다. 라는 명칭이 쓰이기 시작하여 석가모니를 수호하는 성수 의 상징이 되었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도 사자는 강력한 힘과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동물로 표현되고, 이집트인들은 사자를 제왕 파라오 의 힘과 위엄에 비유하여 사자의 몸에 인간의 얼굴을 한 스핑크스 상을 만들기도 하였다. 일찍이 인도인들은 사자의 힘을 공경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불교 발생 이전에는 고대 여신의 힘을 상징하여 여신의 대좌에 사자상을 조형하여 권위의 상징으로 삼았다. 불교 발생 이후에는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문수보살 이 사자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인도에서는 불교의 발생과 함께 석가모니를‘인중사자 ’ 라 하였으며, 부처의 대좌를 ‘사자좌 ’ 라 칭하기도 한다. 이는 석가모니가 모든 마귀를 물리치고 절대적인 경지에 오른 것을 모든 동물을 굴복시킨 백수의 왕인 사자에 비유한 것이다. 부처의 설법을‘사자후 ’ 라고 하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과 깊은 관련이 있다. 때문에 사자는 불교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상징적 동물로서 불상의 대좌를 비롯 하여 불탑, 석등, 부도 등 불교와 관련된 다양한 기물 器 에 적극 활용되었다. 삼국시대 불교 전래 초기의 호법 과 호위 의 역할을 강조하던 것에서부터 점차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석불이나 부도, 석탑, 석등, 석비 등 돌로 만든 다양한 기물에 표현된다. 한편으로 당 나라의 영향을 받아 능묘의 호위 석상으로 사자상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다리 위의 화표석이나 불 을 수호하는 역할을 강조하여 향로에 표현되기도 하고, 기와의 사자문 수막새 등 벽사 의 의미를 지닌 문양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현존 우리나라 사자 양식이 잘 표현된 석등의 예를 들면,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사진 1 법주사 쌍사자 석등[ 과 사진 2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 사진 3 영암사터 쌍사자 석등[ 을 들 수 있고, 고려 시대의 것으로 사진 4 여주 고달사터 쌍사자 석등[高 , 그리고 조선초기의 것으로 사진 5 양주 회암사터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앞 과 사진 6 충주 청룡사터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 앞 을 들 수 있다. KEA 2012 January + 19 석등[ ] 사자 석등 ① 사진 및 자료 /《조선고적도보》4,《신라의 사자》국립경주박물관,《석등 부도 비》중앙일보사 글 민병근 전기박물관 학예연구사 사진5 양주 회암사터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앞 // 조선시대// 석등 높이 250cm// 보물 389호// 경기 양주시 회천면 회암리 산8-1// 2011년 5월 개인 촬영 사진6 충주 청룡사터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 앞 // 조선시대// 석등 높이 196cm// 보물 제656호//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 2// 정영호 감수, 《석등 부도 비》한국의 미 15 1990년, 중앙일보사 사진 5 사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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